갈 수 있는 한 멀리
-
자동차세 환급 받으러 가는 길갈 수 있는 한 멀리 2022. 11. 30. 17:51
날이 많이 추워졌다. 출근 준비를 하고 아버지에게 갔다. 아버지는 약속을 잊으셨는지 외출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으셨다. 지난 주에 소유하시던 차를 폐차할 수 있도록 도와드렸고 오늘 구청에 가서 자동차세 환급 받기로 한 것을 까맣게 잊으셨던 것이다. 서두르다 챙겨야 할 물건을 잊으실 까봐 내가 먼저 나와서 차에 시동을 켰다.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말이나 행동을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시고 스스로도 청렴 결백이 몸에 배신 분이시라 자식인 내게도 미안한 마음에 허둥지둥 하시는 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이제 검은 머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바지에 실수라도 할까 조마조마 하시면서도 다른 사람 불편을 먼저 생각하시는 분. 나의 차를 얻어 타시며 미안해 하시는 마음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최대한 서두르지 않고 불안..
-
낄끼빠빠갈 수 있는 한 멀리 2022. 11. 11. 17:47
팔순을 넘기신 엄마가 먼 길을 가야한다며 전화통화하면서 적어둔 지명이 있는 쪽지를 내밀었을 때 나는 짜증부터 밀려왔다. 알지도 못하는 팔촌의 당숙 이야기 같은 사람의 손녀가 결혼한다는 이야기는 내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다. 누군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엄마는 종이를 내민채로 당신이 적어놓은 지명이 맞는지도 모르겠다며 연신 같은 말을 반복하셨다. 그 종이를 들여다 보는 엄마의 뒤통수는 흰머리 반 회색머리 반으로 파마로 만 머릿결이 푸석푸석하게 자라있었다. 사는 곳은 인천인데 결혼식장은 부천이래 하면서. 그래서 날더러 어쩌라는 거지? 엄마가 결혼식장에 가는 길이 자신이 없으셨던 걸 모르는 게 아니었다. 내가 엄마네 집으로 들어오기 전 같으면 결혼식장 이름만 검색해서 당연히 모시고 갔을 길이었다. 그게 누구의 ..
-
고양이 밥 주는 아줌마갈 수 있는 한 멀리 2022. 10. 24. 18:52
- 엄마는 마을 주변 사람들을 지칭할 때 그 사람의 주된 행동으로 이름을 지어 말씀하시곤 했다. 도시에서 살아남는 동물들은 흔하다. 고양이, 참새, 지렁이, 까치, 까마귀, 쥐, 비둘기 등등. 어릴 적 길에서 흔하게 보던 개들은 오히려 집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반려동물이 코로나를 통과하며 붐을 이뤘다. 나도 딸이 그렇게도 고대하던 강아지를 한 마리 들였다. 집 주변에서 서성이며 먹이를 구걸하던 녀석을 들이려다 식구들의 반대로 유기견을 입양한 것이다. 엄마는 날이 궂어도 날이 좋아도 녀석을 챙겼다. 그 녀석은 귀 한쪽이 없다. 다른 길고양이와 영역 다툼을 하다 잃었다. 엄마 말고도 녀석에게 밥을 주는 이는 또 있었다. 맞은편 흰색 건물 2층에 거주하는 뚱뚱한 아주머니가 하나 있었다. 그이는 길고양이에게 밥..
-
봉숭아 물들이기갈 수 있는 한 멀리 2022. 10. 17. 22:51
2022년 여름방학의 마지막 날. 금요일이었다. 아이들이 하나둘 교실로 들어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13명이 출석한 교실은 조용했다. 이제 아이들이 제법 학교 생활에 적응한 듯 보였다. 나는 내 책상에 앉아 브라우저를 열어 습관처럼 뉴스 기사를 훑었다. 내 바로 옆에는 우리 반에서 가장 말썽꾸러기이며 순진무구한 유덕*이 앉아있다. 녀석은 키득거리며 책을 읽었다. 그러다 갑자기 조용해졌다. 내가 아이를 바라보니 아이는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 자세가 매우 불량해 늘 지적을 받던 아이인데 얌전했다. 나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그때 녀석이 일어나 내게로 왔다. “선생님” 나는 녀석을 대답 없이 쳐다보았다. “어제 방학 숙제했어요.” 녀석은 방학 숙제로 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