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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 오는 한밤중의 산책
    인생과 견생 사이 2022. 10. 12. 23:14

    우리가 키우는 강아지는 하루에 두 번 산책을 한다. 배변 훈련에 실패하고 실내에서 절대 변을 보지 않는 녀석 때문에 반드시 두 번이어야 한다. 출근 전에 한 번, 퇴근 후에 한 번. 물론 산책이 지겨워질 때도 있어서 실내배변 연습을 시키기도 했지만 녀석의 고집에 우리가 먼저 지쳐나갔다. 낮 동안에는 부모님 댁에서 돌봐주시니 산책할 때 반드시 배변을 보아야 한다. 연로하신 부모님께 강아지 배변까지 부탁할 순 없으니까. 딸 없이 산책을 나갈 때는 꼭 개모차에 태워 나간다. 집 앞에서 딸을 기다리느라 산책이 늦어지기 때문이다.

     

    10월 한글날 연휴 삼 일 중 이틀 비가 왔다. 비는 그칠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녀석이 많이 급해보였다. 올 가을 들어 처음 보일러를 틀어서 아늑하고 밖에는 비가 와도 집안은 보송하니 온기가 가득이어서 정말 나가고 싶지 않은 밤이다. 하지만 녀석의 눈빛을 보면 싸기 일보직전의 표정이다. 그래 사람도 참기 힘든데 고생시키지 말고 언른 갔다오는게 낫지. 나는 우비를 챙겨 입었다. 남자 사이즈에 맞는 우비를 팔과 기장을 안쪽으로 접어 양면테이프로 고정한 비옷이다. 입고 나면 허수아비 모양같다. 색은 군청색. 사이즈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모자는 쓰면 거의 벗겨져 안쪽에 캡모자를 써야만 비를 맞지 않는다. 강아지 산책 가방을 크로스로 가슴에 매고 우비를 입으니 가슴이 불룩하게 비어져나왔다. 단추를 잠그니 영락없는 곱추다.

     

    개모차는 전체를 덮는 방수커버와 바구니만 덮는 비닐커버가 있다. 방수커버를 벗겨내고 뚜껑이 있는 비닐커버를 열어 녀석을 안혔다. 정말 급했는지 얌전히 들어간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해 개모차 안으로 비가 새들어가지 않게 비닐커버를 단단히 여미고 지퍼를 닫았다. 비가 오는 양으로 봐서는 천둥번개가 치지 않는게 신기할 정도다. 벌써 비옷은 흠뻑 젖었다. 인근 산을 향해 개모차를 밀었다.

     

    춥고 비가 와선지 저녁시간을 훌쩍 넘어버려선지 주택가 거리가 한산했다. 산까지 가려면 거의 세 블럭 정도를 걸어가서 길을 건너야 한다. 지그재그로 난 산길을 개모차를 밀어 올라가면 운동기구가 나온다. 사람들은 지그재그 길을 가로질러 난 계단을 따라 난 산길을 다닌다. 산 너머에는 신축 아파트 세 동이 서 있다. 산이래야 잠깐 오르다 내려가면 되는 그냥 언덕 정도이니 밤시간이라도 외등이 곳곳에 있어 사람들 이동이 잦은 편이다. 외등 아래에는 여느 공원이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운동기구들이 줄지어 있다. 운동기구들 앞에 지어진 정자에는 사람들이 운동할 때 쓰는 훌라후프가 놓여있고 목베개와 이불도 가져다 놓은 게 보였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정자 안까지 비가 들이친 것이 외등에 비쳐 보였다.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소나무 둥치로 바람이 불어 웅웅 소리가 났다. 발목 아래로 바람이 지나갔다. 나는 늘 개모차를 세우던 곳으로 개모차를 끌고 갔다. 아무렇게나 나뒹굴던 정자 안 이불이 얌전히 개켜있었다. 그리곤 어디서 '휘익' 소리가 났다. 골프채를 힘껏 휘두르면 나는 소리와 너무 흡사했다.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검은 실루엣의 남자 하나가 운동기구 뒤어서 나왔다. 그 사람 옆에는 청소부나 쓸법한 빗자루와 다른 막대가 기대어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캡모자가 얼굴을 가리도록 했다. 비가 왔으므로 정자 아래로 가서 개모차를 세웠다. 다시 '휘익' 소리가 났다. 남자는 우산도 없이 아래위로 검게 입고는 계속 쇠막대를 휘둘렀다. 휘두를 때 외등 불빛으로 반사광이 막대를 훑고 지나갔다. 흘끔 보니 골프채 머리가 없는 걸로 봐서 그냥 쇠막대 같았는데 길이가 꾀 길었다. 사람이 맞으면 뼈가 으스러지거나 부러지는 건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

     

    그냥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괜히 강아지 산책 나온 사람을 해코지 하지는 않겠지. 대신 강아지를 내려 반대 방향의 길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길로 가면 최근에 벌초를 해서 여름내 자란 우거진 풀숲들이 깨끗이 청소되어 있는 동산이 나온다. 다행이 강아지도 순순히 잘 따라왔다. 녀석은 비가 와선지 몇몇 군데 마킹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금세 똥을 눴다. 우비 가슴을 열어 응가봉투를 꺼내 뒷처리를 하는데 갑자기 녀석이 움찔했다. 녀석은 얼룩이지만 흰색은 빛을 반사해서 유난히 밝다. 비가 오고 외등이 없어도 녀석은 잘 보이는데 주변에 또 뭔가 있나 싶어 고개를 드려는 순간 다시 '휘익'했다. 남자가 우리 곁에 서 있었다.

     

    빗소리 때문에 다가오는 것도 따라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비는 더 세차게 내려붓고 있었다. 녀석은 겁에 질렸는지 짖지도 못하고 꼬리를 내린채 눈치를 보며 개모차가 세워진 정자쪽으로 걸었다. 내가 강아지를 따라 걷기 시작했을 때 다시 '휘익' 했다. 이번에는 더 세게 휘두고 더 많이 휘둘렀다. 풀이 막대에 부딪혀 잘리는 소리가 났다. 연거푸 휘익휘익 하는 소리가 우리를 따라왔다. 나는 갑자기 온 몸이 굳어져오는 것을 느꼈지만 고개는 들지 않고 그냥 가던 길을 갔다. 정자 앞에서 녀석을 태우고 비닐커버를 닫았다. 다시 '휘익'. 남자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정자 앞에 서 있었다. 내 캡모자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전화를 할까? 그러려면 우비 가슴 단추를 뜯고 가방을 열어 핸드폰을 켜야 한다. 그러는 동안 그가 나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그냥 그 억수같은 비를 맞으며 일초라도 빨리 산을 내려오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계단쪽 길에 접어들면 CCTV가 설치 되어 있으니 안심이 되었다. 내가 계단으로 난 길에 발을 디뎠을 때 등 뒤에서 다시 '휘익'했다. 그러곤 뭐라 지껄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빗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지그재그로 난 길을 개모차를 끌어 내려왔다. 나는 뛰지 않았다. 그냥 천천히 내려왔다.

    그가 내 등뒤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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